2013년 11월 11일 월요일

마오리 문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뉴질랜드의 마오리 아트
뉴질랜드는 관광산업에 초점을 맞추고 때묻지 않은 자연과, 유럽이나 미주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마오리 아트를 적극 권장하여 선보인다. 마오리어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유명 지역과 산천수목에는 어김없이 신비스러운 설화가 전해진다는 안내자의 흥미로운 설명이 관광객들의 관심을 증가시킨다. 정교하고 대범한 나무 조각품들과 기하학적 문양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의류나 돗자리, 힘차고 율동감 넘치는 전사의 춤과 노래(haka), 뜨겁게 달구어진 돌 밑에서 온종일 구워진 고구마와 고기요리(hangi)등, 유럽의 문화만을 연상했던 뉴질랜드에서 만날 수 있는 마오리 아트는 생각보다 역사가 깊고 인상적이다.
                                                                                   
글 ┃ 장남숙 서울산업대학교 도예학과 강사

 

뉴질랜드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들은 수 천년 전에 폴리네시아 동부에서 카누를 타고 항해 중이었던 사람들이다. 이 탐험가들은 열대성 기후의 작은 섬에서 발달된 신석기 시대 유물과 기술을 들고 왔으며 추운 뉴질랜드의 날씨에 맞게 그 재료와 문화를 적용시켰다. 그들은 주로 따뜻하고 농사에 적당한 북섬에 정착하여 부족을 형성해 나갔다. 초기 마오리족은 부족간의 전쟁에 의해 형성되었고 전사족장은 최고의 존경을 받으며 가장 좋은 물건들을 향유했다. 그들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전장에서 죽는 것이었으며, 가장 치욕스러운 일은 포로가 되어 노예로 남는 일이었다.

마오리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기 마오리 사회의 기본 구조를 알아야 한다. 초기 유럽계 마오리족 사회는 혈통과 결혼에 의해 정해졌으며 그 사회는 줄기와 거기에 딸린 굵고 가는 가지로 형성된 나무와도 같다. 젊은 남녀는 계급에 맞추어 결혼을 했으며 경제적 여유가 된다면 여러 명의 남편과 부인을 둘 수 있었다. 부족간의 지역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쟁과 싸움이 빈번히 일어났으며 어떤 부족이 쇠약해지는 동안 어떤 부족은 아주 번창해 나가기도 했다. 이롭거나 해로운 동맹관계, 전쟁에서의 행운, 예측 불허의 날씨의 영향에 따른 고구마나 곡식 농사 등 많은 요인들에 의해 그들의 생활은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사회에서 개인의 지위는 혈통과 성별에 의해 결정된다. 신에 가장 가까운 계보를 가진 사람들이 귀족 중에서도 첫 번째 계급이고, 첫 번째로 태어난 아들이 지도권을 상속 받는다. 여자도 명망을 지닐 수는 있지만 사회적 역할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족장 밑에 여러 계급의 지도자들이 있으며, 그들 밑에 사회의 주축을 이루었던 평민들이 있었고, 그 밑에 지위도 권리도 없이 단지 경멸의 대상이었던 노예 계급이 있었다. 그들은 전투에서 사로잡힌 죄수들로서 그들의 자식들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재산권은 현대와는 달라서 땅, 집, 카누나 비교적 크고 값진 것들은 공동의 소유였다. 상류층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로 일 등급의 공예가들을 키우며 그들의 생산품을 지배했다. 따라서 마오리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족장 계급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망토, 장식품, 무기, 집의 장식품, 그리고 살림 도구 등은 그들의 삶을 품위 있게 해주는 것이자, 상류 계급의 상징이기도 했다. 각각의 수공예품들은 초능력의 세계에 속해서 하늘이나 지하 세계로부터 보호 받고 있다고 생각되었으며, 만드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남자였고 성직자들 중에서 좋은 출신이나 뛰어난 재능에 의해 뽑혔다. 일반인들 중에서도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예술가로서 존경을 받을 수 있었으나, 종교적인 것에 속한 중요한 공예품을 만드는 일은 상류층 사람들의 몫이었다. 공예가들, 예를 들어 나무 조각가나 문신 조각가들에게는 부족의 거주지와 양식, 일용품들이 제공되었다. 공예품을 만드는 일에 대해서도 성별 차이가 있어서 여자들은 부드러운 재료인 식물 등을 사용한 장식품이나 돗자리, 바구니 등을 엮는 일을 주로 하는데 반해서, 남자들은 거칠고 무거운 재료인 나무, 뼈, 돌 등을 사용해 작업했다.

초기 마오리 예술은 수세기에 걸친 노력과 공예적 실험에 의해서 현대까지 발전되었으며, 디자인이나 주제, 양식 등은 그들의 고향인 남동 아시아나 중국 연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뉴질랜드 마오리를 포함해서 모든 폴리네시안 공예품의 성격은 한 개의 단일 재료에서 한 개의 작품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한 덩어리의 나무 조각으로 작업하는 것을 선호하며, 다른 조각과 덧붙이지 않는다.
모든 마오리 공예품은 일상 생활에 필요한 낚시 바늘, 깎기∙파기 위한 도구 등이나 정신 세계의 만족을 얻기 위한 종교적 제식에 필요한 것 등 실용적이거나 상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그릇이나 삽 같은 것들이 생명이 없는 물건으로 취급되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만든 것에는 영혼이 상재한다고 믿었다. 특히 솟대나 판넬 벽이나 다른 물건들을 만들 때 그 원래의 쓰임새를 고수하면서도 예술적인 디자인으로 조상들의 형상을 표현하였다. 마오리 공예품들은 놀라울 만큼 그 형태와 기능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기능을 우선으로 여기는 것이 철칙이다.

19세기 중엽 이후 마오리 나무 조각가들은 유럽에서 도입된 다양한 금속 도구들을 이용하면서 조상들로부터 전승되어 오던 도구를 사용해서만 얻을 수 있었던 독특한 맛은 읽고 말았다. 도구, 종교, 사회적 여건 그리고 사람들의 생활 양식에도 큰 변화가 왔으며 마오리 장인정신의 변화도 필연적이었다. 19세기 작품들은 창의적이었고 개념에 있어서 매우 힘찬 생기가 있었다.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작품들과 개인 소장품들의 대부분이 이 때 만들어진 것이며, 사실상 이 시대 작품들이 마오리 아트를 대변하는 작품들이다.


 
 일반적으로 마오리 아트는 측면이 아닌 작품 앞에서 감상할 수 있게 디자인된 정면적 예술이다. 측면에서도 감상할 수 있게 만들어진 조각품일지라도 정면을 더욱 정교하고 공들여서 장식했다. 마오리 아트는 정면에 치중하면서 기하학적이다. 조상들과 초자연 세계의 신령함을 주제로 규칙적인 디자인 법칙에 따라 표현되었다.  각각의 예술적 공예가들은 각자의 취향을 갖고 표현하지만 기본적인 주제뿐만 아니라 구도나 배치의 원칙에 있어서도 전통과 규율을 따라야만 했다. 대칭적 배합은 비대칭을 압도한다.

나무 조각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마오리 아트 구성의 기본은 특별한 상징과 주제가 장식 안에 고대로 보이며 반복되는 것이다. 돗자리나 바구니 등을 보면 가장자리를 아주 자연스럽게 직선에 의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한 것을 볼 수 있다. 직선의 디자인이 정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며 동시에 곡선적이거나 나선형의 문양이 창의적이고 활기찬 역동성을 보여준다.
조각은 마오리 아트를 대표하며 승인된 전문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 조각 행위는 장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상과 역사, 신화와 전설에 대한 깊은 경외심의 표상이 된다. 마오리 조각의 주류는 인물 형상이다. 얼굴은 대칭적이고 문신이 그려져 있는데 그 문신의 디자인으로 각 부족이나 인물을 구별한다. 대부분이 과거 부족 역사에서 유명한 영웅이기도 하고 신일 경우도 있는데 그들의 역할은 후손들을 보호하고 안식을 주는 것이다. 마오리 설화에 의하면 신들이 창조되기 전에 어머니인 땅(Papa)과 아버지인 하늘(Rangi)은 영겁의 세월을 서로 껴안고 살았다. 그 신의 아들들이 태어났지만 어둡고 꽉 죄어진 그들의 부모들 사이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마침내 아들 중의 하나인 숲의 신 Tane이 강제적으로 그들을 떼어내서 이 세상에 빛이 들어오게 되었고 지금의 하늘과 땅이 형성되었다. 인물 형상은 가끔 부엉이 같은 새의 형상을 띄기도 하는데 마오리에게 새는 안내자의 역할도 하고 행운을 선사하며 영혼을 운반해 주기도 한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재료 중에 하나가 단단하고 질 좋은 나무이다. 마오리에게 나무는 숨의 신, Tane의 아이들로, 어머니인 땅의 신의 옷을 입고 다른 형제 신들의 자손들인 새, 인간 그리고 다른 창조물들에게 집을 제공하고 있다. 마오리는 단단한 나무들로 카누와 집을 짓고 무기나 도구를 만들었으며, 아름다운 녹색과 자주색 톤의 무지개 빛 전복 껍질은 나무 조각 입사에 좋은 재료이다.
 
잎이 2m 혹은 그 이상으로 자라며 섬유질이 많은 아마류의 flax는 뉴질랜드 곳곳에서 풍부하게 자라고 있다. 잎사귀 섬유를 만들기 위해서 선별해서 자르고 껍질을 벗기고 조개 껍질을 이용해서 녹색 섬유질을 다 긁어낸다. 그것을 적시고 두들겨 햇빛에 표백시키면 아주 질기고 유연해져서 여러 가지 옷이나 망, 낚시 밧줄 그리고 음식 저장 그릇이나 카누 배를 묶어주는 끈들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햇빛에 잘 표백된 flax 껍질로 꼬아서 멍석, 바구니, 전쟁용 허리띠 등을 만들기도 한다. 검은 진흙으로 물들인 검정색 껍질과 물들이지 않은 껍질을 같이 꼬아서 여러 가지 문양들을 만들어낸다. Flax 섬유를 이용해 옷을 만들 때 뉴질랜드에 서식하고 있는 다양한 새의 깃털은 고급 망토를 치장해 주는 좋은 재료이다. 박도 식용으로 정원에서 자라지만 껍질은 우리 나라 호롱박 바가지처럼 개조하여 koru(나선형 문양) 문양으로 아름답게 장식해서 물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마오리 아트에 사용된 색은 적토, 청회색토나 숯, 진흙 그리고 식물에서 발췌한 여러 가지 혼합물 등이다. 다양한 색의 깃털이나 비취빛 옥돌 등 자연에서 직접 얻을 수 있는 재료들의 색들이 마오리 아트의 색을 대표하고 있으며, 인공적으로 만들어서 쓰는 색은 매우 드물다.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색은 철분이 풍부하게 함유된 고운 적토에서 얻어낸 붉은 색이다. 그 흙을 캐서 분말가루로 만들어 물과 섞고 볼로 갈아준 후, 불이나 뜨거운 재로 구어 낸다. 이렇게 준비된 안료는 옷에 물들이거나 상어 간의 기름과 섞어서 조각품 위에 칠하기도 한다. 붉은 색은 마오리 신앙에서 신성한 색으로 여겨져 신이나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과 관련된 색으로 취급 받았다.

상아나 뼈, 나무, 돌 등에 깊거나 얕게 조각된 문양을 보면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koru(나선형) 문양이다. 이런 문양은 고대 아시아, 그 중에서도 중국 남부와 남동부 아시아에서 발견되는데 그 지방으로부터 마오리 조상들에 의해 뉴질랜드로 도입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사실 이 koru 형태는 고사리류 줄기가 펴지기 전이거나 말려진 잎새 등의 형태를 나타내기도 하며 파도 치는 물결과도 비슷하다. 수천 년을 걸쳐 아이들이 모래 위에 막대기나 손가락으로 자연스럽게 그릴 수 있는 이 문양이 마오리 아트에서 아름답게 발전되어 지금까지 사용 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마오리 아트를 대표하는 것들 중에 주요 나무조각 예술은 전쟁을 위한 카누배 축조, 집 건축(저장고, 거주지 그리고 회의 장소 등) 등에서 볼 수 있다. 카누는 초기 유럽피안 시대부터 1850~60년대까지 부족에게 가장 귀한 소유물이었다. 저장고는 도둑, 쥐, 개 그리고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습기로부터 귀한 음식이나 장비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며 상자형 구조물로서 높은 기둥 위에 세워져 있다. 넓은 집회 장소는 정치적인 목적과 지역 공동체의 회의 장소로서 마오리 아트의 시각 예술의 극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마오리 아트의 양식과 디자인은 카누나, 저장소나 집합장소에서 보여주는 공동체가 만들어낸 엄숙한 미학이 있는 반면, 친밀한 개인 소장품에서 극도의 아름다움을 성취했다. 초기 마오리 시대에 가장 명백한 개인용 장식품은 비취옥이나 다른 재료로 만든 사람 형태의 장식품 ‘Hei-tiki’ 이다. Hei-tiki는 조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값진 연옥으로 만든 Hei-tiki는 희귀하고, 돌 깎는 기구로 갈음질 해서 만드는 힘든 공정 때문에 집안의 가보로 소중하게 다루어졌다.

문신은 예술 중에 가장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오직 족장급 사람들만이 몸의 일부 중 가장 신성한 머리 부분인 얼굴에 문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문신 예술가들은 아주 신성한 사람으로 취급 받았다. 문신이 없는 여자나 남자는 아무 계급이 없는 평민이었고 문신이 없는 얼굴은 추하게 여겨졌으며 귀족계급의 여자들은 문신이 잘된 남자와 사랑에 빠지곤 했다. 그 지울 수 없는 문신은 엄숙한 제의식에 의해 행해지며 문신을 한 사람은 결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문신을 할 때 주요한 선들은 다른 전통적인 문신들과는 달리 뼈로 만든 조각칼을 사용해 얼굴에 깊은 상처를 내며 조각을 하고, 나머지 문양으로 채워진 부분은 겉 표면만 가볍게 상처를 낸 뒤 태운 카우리 나무 액체나 식물의 애벌레 등에서 만들어낸 검댕이로 색을 들인다.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남자들은 머리를 길렀으며 말아 올려 빗 모양의 장식품’comb’ 을 꼽았다. 여자들은 장식품 없이 머리를 그냥 길러 늘어뜨렸지만 결혼한 여자들은 짧은 머리를 하였다. 대개 comb은 나무나 고래 뼈로 만들고 위 부분을 새 모양으로 조각하거나, 아니면 나무로 만든 조각들을 flax끈으로 꼬아 보기 좋게 엮은 것들이 있다.
식물 flax, 새의 깃털, 동물의 꼬리털 등을 엮어 질 좋은 망토를 짰다. 18~19세기에 만들어진 flax로 엮은 망토는 아주 아름답다. 문양은 삼각형과 지그재그, 마름모꼴과 다이아몬드형의 문양으로 조합된 것이고,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의 식물에서 얻은 색이나 진흙으로 물들인 검정색으로 장식했다.

마오리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이웃의 적을 상대할 수 있는 군사적인 힘을 키우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 침입자를 막고 해변과 숲을 경작해서 음식을 공급할 수 있는 지역을 확보했으며, 어업은 삶을 지탱시켜주었던 조상들의 주업이었다. 그것은 신성한 활동이었고 그것을 위한 제의식은 바다 신의 규제를 받는 것이었다. 고기와 뼈, 깃털을 제공하는 들새, 물새 사냥도 생활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땅을 일구기 위한 도구들과 어업에 관련된 도구들, 그리고 무기 등을 만들고 장식해서 사용했다. 무기들은 개인의 보물이며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남자들이 정장을 할 때 항상 무기를 손에 들어야 한다. 족장은 모임에서 짧은 곤봉 형태의 무기를 들고 연설을 강조할 때 사용했다. 그 곤봉은 나무, 고래 뼈나 돌 등으로 손에 편안하게 조각되었으며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옥돌로 만들어진 것이 가장 값진 것이다.
 
다른 여느 토착민들이 그러하듯 마오리들도 뉴질랜드에서 평탄한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뉴질랜드가 백인들에게 발견된 이후, 1880년 조약을 맺고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1880년 대 중반에 유럽인들과 마오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유럽인들은 마오리의 문명을 지우고 그네들에게 동화시키려 하였다. 그 땅에서 문화의 발자취인 마오리의 문신을 제거하거나 지워버리고 통합시켰다. 유럽인의 의식으로 억지로 바꾸려 하였고 마침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마오리의 살아있는 얼굴이 다른 얼굴, 문신이 없는 유럽인의 얼굴이 되었다.
그 과정은 성공한 듯 보였으나, 2차 세계대전 즈음에 마오리인들은 과거와 문화를 되찾는 노력을 시도했다. 그 결과로 1950년대는 그 뿌리로 돌아가는 중요한 때가 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유럽인의 얼굴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얼굴을 찾는 노력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그네들의 문화가 마오리 문화보다 우위라고 생각하는 유럽인들에게 식민화되었던 마오리의 정신과 창조성을 되찾기 위해 스스로 일어섰던 것이다. 1970년대부터 젊은 작가들이 스스로 아트 집회를 갖고 서로 모여 목소리를 높이고 그들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였다. 1973년에는 마오리 작가 연합을 설립하여 지역 작가들의 전시와 작업을 지원했다. 그들은 작가들을 격려하고 기술과 아이디어를 나누며, 전통적 아트 형태를 보존∙발전 시키면서 그들의 경험을 확장시켜나갔다. 1978년 정부는 마오리 협의회의 제안에 따라 의회 산하 마오리 아트를 위한 협의회를 발족하였다. 또한, 1982년 마오리 예술가들의 협의결과 의회정책에 작가들이 직접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고 4년 안에 전통과 현대 마오리 예술을 대표하는 9명의 의원들이 참가하게 되었다. 그들은 마오리 아트 형태를 발전시키기 위한 연구와 전시를 주관하고 신문을 발간하며 국제적인 교류를 조성하고 토론회와 실연회 등을 열어 마오리 아트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후원금 제도도 발족시켜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발판으로 삼았다.
1984년 마오리 아트는 해외로 진출했다. 뉴욕에서 전시를 마치고 로스엔젤레스와 시카고를 경유해 좋은 결과를 안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마오리 아트의 주체성을 회복하지 않았더라면 마오리 아트의 진실과 이해는 사장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 이후 활발한 국내∙외 전시를 통하여 마오리 아트를 알렸고 현재 국내에서는 마오리 예술가들과 유럽인 예술가들이 함께 전시를 하며 뉴질랜드의 현대 아트로서 공존해나가고 있다.
1995년 Queen Elizabeth II Arts Council에서 현재 Creative New Zealand로 명칭을 바꾼 정부 산하 문화국에서 마오리 아트의 발전과 후원을 도모하기 위한 위원회를 재 설립하였다. 현재 마오리 아트는 스스로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노력하면서, 타협하지 않고 그 기본 정신은 지키되 현대적 발전을 위하여 머물지 않고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장남숙 ┃ 1963년 서울 출생. 서울 산업대학교와 동 대학원 졸업 후, 뉴질랜드의 오타고 예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뉴질랜드의 Temple Gallery와 Contemporary Art Gallery에서 2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Korea & New Zealand Ceramic Art Exchange Exhibition’전, ‘Re-Location’전 등 10여 차례의 단체전을 가진 바 있다. 오타고 예술대학의 강사로 활동했으며, 현재 서울 산업대학교 도예과 강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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